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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라 마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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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히라 마사요시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36년 대장성(재무성)에 들어가 관방장관,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1972년에는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재직하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수립을 이끌었다. 1978년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어 제68대 총리로 취임했고, 이듬해 제69대 총리로 재선되었다. 재임 중 "전원도시 구상", "환태평양 연대 구상" 등을 제창했으며, 1980년 5월 30일 총선거를 앞두고 쓰러져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기여했으며, "아우 총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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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라 마사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8년 공식 초상
이름오히라 마사요시
원어 이름大平 正芳
로마자 표기Ōhira Masayoshi
출생일1910년 3월 12일
출생지가논지시, 일본 제국
사망일1980년 6월 12일
사망 장소미나토구 (도쿄), 일본
배우자시게코 (1916–1990)
자녀4명
서명OhiraM kao.png
정당자유민주당
학력히토쓰바시 대학
일본어 표기おおひら まさよし
한자 표기大平 正芳
직위
내각총리대신재임 시작: 1978년 12월 7일
재임 종료: 1980년 6월 12일
자유민주당 총재재임 시작: 1978년 12월 1일
재임 종료: 1980년 6월 12일
대장대신재임 시작: 1974년 7월 16일
재임 종료: 1976년 12월 24일
외무대신재임 시작: 1962년 7월 18일
재임 종료: 1964년 7월 18일
재임 시작: 1972년 7월 7일
재임 종료: 1974년 7월 16일
통상산업대신재임 시작: 1968년 11월 30일
재임 종료: 1970년 1월 14일
내각관방장관재임 시작: 1960년 7월 19일
재임 종료: 1962년 7월 18일
중의원 의원재임 시작: 1952년 10월 1일
재임 종료: 1980년 6월 12일
수상 재임 기간
천황쇼와
제68대 총리제1차 오히라 내각
제69대 총리제2차 오히라 내각
총리 재임 시작일1978년 12월 7일
총리 재임 종료일1980년 6월 12일
이전 총리후쿠다 다케오
다음 총리스즈키 젠코
정당 경력
자유민주당 총재임기 시작: 1978년 12월 1일
임기 종료: 1980년 6월 12일
자유민주당 간사장임기 시작: 1976년 12월
임기 종료: 1978년 12월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임기 시작: 1967년
임기 종료: 1968년
장관 재임 기간
대장대신재임 시작: 1974년 7월 16일
재임 종료: 1976년 12월 24일
외무대신재임 시작: 1962년 7월 18일
재임 종료: 1964년 7월 18일
재임 시작: 1972년 7월 7일
재임 종료: 1974년 7월 16일
통상산업대신재임 시작: 1968년 11월 30일
재임 종료: 1970년 1월 14일
의원 경력
중의원 의원선거구: 가가와 현 전국구
임기 시작: 1952년 10월 1일
임기 종료: 1980년 6월 12일
훈장 및 작위
작위정2위
훈장대훈위 국화대수장
포장감수포장
기타중의원 영년 재직 의원
상학사 학위

2. 생애

가가와현 태생으로 도쿄 상과대학(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 1936년 대장성에 입성하여 근무했다. 1951년 이케다 하야토 대장대신의 비서관으로 지냈으며, 당시 이케다 대장대신의 권유로 1952년 중의원선거에 입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돼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960년 이케다 내각에서 관방장관, 1962년외무대신으로 지냈고, 1964년 사토 에이사쿠 정권이 들어선 후 자유민주당 정조회장을 지냈다. 이후 사토 내각의 통상산업대신,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취임하여 같은 해 1972년 9월에 다나카 총리와 함께 중국을 방문,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이끌었다.[28]

1978년의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하여 당시 재선을 노리는 후쿠다 다케오와의 대결에서 후쿠다는 선거에서 후보직을 사퇴, 자민당 총재로 선출됨과 동시에 제68대 총리로 취임했다. 이듬해인 1979년에 제69대 총리로 재선되면서 제2차 내각(제2차 오히라 내각)을 발족했다.

그러나 총리 재임중이던 이듬해인 1980년 5월 30일에 총선거가 공시된 후 가두연설 직후에 갑자기 쓰러져 과로와 부정맥 등 합병증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병원에 입원한 것에 대해 자민당내 반주류파(反主流派) 인사인 나카가와 이치로가 "건강 문제를 일으킨 오히라 총리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릴 예정인 주요 선진국 정상회의의 참석이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총리직 사퇴를 결정 해야 한다"라고 발언한 것을 시작으로, 또 다른 반주류파 인사인 고모토 도시오는 오히라의 완쾌를 빈다고 말하면서도 "주요 선진국 정상회의 참석 문제는 빨리 결정 해야 한다"는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밝혀 은근히 오히라 퇴진을 요구하는 등 반주류파의 일부에서 총리 퇴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히라는 이런 자신의 파벌(오히라派)에 속한 일부 의원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행동을 보며 크게 격노했고, 6월 12일 오전 5시 54분경 급성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 초기 생애 ==

오히라 마사요시는 1910년 3월 12일 가가와현 미토요군 와다촌(현 관음사시)에서 농부인 오히라 도시요시와 그의 아내 사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마을 의회와 관개 조합의 대표였다.[2][3] 형제자매는 여덟 명이었지만, 오히라가 태어났을 때 장녀는 만 1세, 형 중 한 명은 2세 반에 이미 사망했다.[3] 오히라는 자신을 "사누키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그의 가족은 중산층이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여섯 자녀를 부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오히라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부업을 도왔다.[2][3]

오히라는 와다무라 정촌 다이쇼 보통고등소학교(현 간온지시립 도요하마소학교), 구제 가가와현립 산토요 중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중학교 4학년 때 장티푸스에 걸려 4개월 동안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다.[3] 가계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해군병학교 시험을 보려고 했지만, 시험 전에 급성 중이염을 앓아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되었다. 이듬해인 1928년, 친척들의 도움과 장학금을 받아 가가와대학 경제학부의 전신인 고마쓰 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고상에 입학한 봄, 사토 사다키치의 강연을 계기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고, 1929년 말 칸온지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16]

고상 졸업 후, 오히라는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 포기했다. 쇼와 대공황의 여파로 취업도 어려웠기 때문에, 모모야 준텐칸에서 화장품업에 종사하며 식객 생활을 했다. 1933년, 다시 학업에 복귀하기로 결심한 오히라는 가마다 공제회와 가가와현 육영회의 두 개의 장학금을 받아 도쿄 상과대학(현 일련대학)에 23세의 나이로 진학했다.[2] 분쿄구센다기에 거처를 마련하고, 재학 중에는 스기무라 코조, 마키노 에이이치 등의 강의를 수강했다. 요네야니 류조를 사사했다고도 전해진다.[17] 기독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YMCA 활동에 종사했다. 대학 재학 중, 요시나가 에이죠, 후가시 소이치, 무노 요시하루, 코지마 타사쿠 등과 함께 헌법의 타나가미 조지 강사와 국제법 교수 오오히라 젠고를 중심으로 한 연구회에서 고등시험 공부를 했다.[18]

1936년 대학을 졸업하고 재무성에 들어가 이케다 하야토의 눈에 띄어 그의 측근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이케다가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재무대신을 역임했을 때, 오히라는 그의 비서관으로 일했다.

== 정치 경력 ==

1935년 고등 시험(행정과)에 합격한 후 1936년 대장성에 들어가 근무했다. 1951년 이케다 하야토 대장대신의 비서관으로 지냈으며, 1952년 중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돼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20] 1960년 이케다 내각에서 관방장관, 1962년외무대신으로 지냈고, 1964년 사토 에이사쿠 정권이 들어선 후 자유민주당 정조회장을 지냈다. 이후 사토 내각의 통상산업대신,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취임하여 같은 해 1972년 9월에 다나카 총리와 함께 중국을 방문,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이끌었다.[28]

1978년의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하여 당시 재선을 노리는 후쿠다 다케오와의 대결에서 후쿠다는 선거에서 후보직을 사퇴, 자민당 총재로 선출됨과 동시에 제68대 총리로 취임했다. 이듬해인 1979년에 제69대 총리로 재선되면서 제2차 내각(제2차 오히라 내각)을 발족했다.

외무대신 시절의 오히라. KCIA 국장 김종필과 (1962년).


1980년 외유 중 미국 앤드루스 공군 기지에서의 오히라 마사요시


1952년, 이케다 하야토의 권유로 오히라 마사요시는 일본 국회(일본 국회의원 의원)의 10선에 도전하여 당선되었으며, 처음에는 일본 자유당(Liberal Party (Japan, 1950))을 대표하다가 이후에는 후계 정당인 일본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LDP)을 대표하게 되었다.

1957년, 이케다 하야토가 총리가 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오히라 마사요시는 이케다의 싱크탱크인 고치카이(Kōchikai)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이케다의 오른팔로 널리 인식되었다.[4] 그는 이케다의 연설문과 선거 공약 작성을 도왔다.[4]

1960년, 안보 투쟁(1960 Anpo Protests)으로 인해 기시 노부스케가 사퇴하자 이케다 하야토가 총리가 되었다. 오히라 마사요시는 일본 국민의 관심을 치열한 정치적 투쟁에서 전국적인 경제 성장 추진으로 돌리는 데 기여한 이케다의 유명한 소득 배증 계획(Income Doubling Plan)의 설계 및 실행을 지원했다.[5]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오히라 마사요시는 이케다 하야토의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이 직책에서 1965년 일본과 대한민국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섬세한 협상을 진행했다. 1964년 이케다 하야토가 사망하자 오히라 마사요시는 그의 파벌을 계승하였다.

같은 해 10월 20일과 11월 12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KCIA) 국장 김종필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도쿄에서 가졌다. 경제 협력에 관해 무상으로 3억 달러, 장기 저리 차관 2억 달러, 더불어 민간 신용 공여 1억 달러 이상으로 합의했다. 이 합의 내용은 후에 “오히라-김 메모”로 불렸다.[21][22]

나가사키 국기 사건에 의해 단절된 일중 관계를 현실적인 중대한 과제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대중 관계 개선에 임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봉쇄” 정책에 고통받으면서도, 일중 경제 무역 관계의 확대를 철저히 추구했다.[23]

한미핵반입문제에서 당사자로서 미국과의 핵밀약 체결에 관여했다. 외무대신 시절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의 여파로 주일미군·자위대가 긴장 상태에 있었고, 핵·원자력 관련 문제가 많았다. [24]

1976년에는 후쿠다 다케오와 “2년 뒤 오히라에게 정권 이양”을 한다는 대복밀약을 맺고 대복연합을 수립했다.[28]

== 총리 재임 ==

1935년 대장성에 입성하여 근무한 후, 195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960년 이케다 내각에서 관방장관, 1962년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취임하여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이끌었다.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 다케오를 누르고 총재로 선출되어 제68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취임 직후 총리 관저에서 극우 남성의 습격 사건(미수)이 발생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제69대 총리로 재선되어 제2차 오히라 내각을 발족했다.

오히라는 전원도시 구상, 환태평양 연대 구상, 종합 안보 구상 등을 제창했다. 이란 혁명, 제2차 석유 위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신냉전 시대"의 국제 정세에 대응하여 미국과의 안보 관계를 강화하고, 모스크바 올림픽 출전 보이콧을 결정하는 등 대미 협력 노선을 명확히 했다. 또한,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정부 차관 제공, 일중 문화 교류 협정 체결 등 1980년대 일중 긴밀화의 길을 열었다.

1979년 일본국헌법황실전범 하에서 법적 근거가 소멸했던 연호를 법률에 따라 개원할 수 있도록 한 연호법을 시행했다.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를 밑도는 결과를 초래하자, 당내 항쟁(40일 항쟁)이 발생했다. 오히라는 1980년 사회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자 중의원을 해산(돌발 해산)하고, 중참 동일 선거를 통해 정국 돌파를 시도했다.

1980년 5월 30일 총선거 공시 후 가두연설 직후 쓰러져 부정맥 등 합병증으로 입원했다. 6월 12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1980년 앤드류스 공군기지(Andrews Air Force Base)에서의 오히라 마사요시


키스 홀리요크(Keith Holyoake)와 함께 (1972년 10월)


== 갑작스러운 죽음 ==

197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여 제68대 총리로 취임한 오히라 마사요시는 이듬해 제69대 총리로 재선되어 제2차 오히라 내각을 발족했다.[33] 그러나 1980년 5월 30일 총선거 공시 후 가두연설 직후 갑자기 쓰러져 과로와 부정맥 등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34]

오히라는 70세의 고령과 심장의 지병이 있었고, 총리 취임 이후 과중한 업무와 국내외 정국으로 인한 심적 부담으로 인해 육체적 한계에 달해 있었다.[34] 이전에도 니트로글리세린을 복용한 적이 있었지만 공표되지는 않았다.[34]

오히라의 입원을 두고 자민당 내 반주류파 의원들은 6월에 예정된 주요 선진국 정상회의 참석 문제를 거론하며 오히라의 퇴진을 요구했다.[34] 나카가와 이치로는 건강 문제를 이유로 총리직 사퇴를 주장했고, 고모토 도시오는 완쾌를 기원한다면서도 정상회의 참석 여부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압박했다.[34] 심지어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마저 과도 정권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오히라의 퇴진을 시사했다.[34] 오히라는 이러한 퇴진 압박에 크게 격노했다고 알려진다.

입원 중에도 오히라는 퇴원 후 정상 회담에 참석할 의지를 보였으나, 6월 12일 오전 5시경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7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35][28]

오히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이토 마사요시 관방장관이 총리 임시대리를 맡았고, 자민당은 사쿠라우치 요시오 사무총장의 주도로 "조의 선거(弔い選挙)"를 치러 15년 만에 최대 승리를 거두었다.[28] 선거 후 스즈키 젠코가 오히라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사망 후 오히라에게는 대훈위국화대수장이 추증되고, 정이위에 서임되었다.[37] 장례식은 내각과 자민당의 합동으로 거행되었으며, 국장 대신 조용한 장례를 희망한 이토의 주장이 반영되었다.[37] 묘소는 도쿄의 다가 묘원과 고향 도요하마의 묘지 공원에 있다.[37]

고향에 있던 선거 사무소는 오히라 마사요시 기념관이 되었으나, 건물 노후화로 2015년 폐관했다.[37] 이후 국립국회도서관과 가가와현립도서관에 문서와 장서가 기증되었고, 2016년 현립 도서관 내 "오히라 마사요시 문고"가 개설되었다.[38] 유품은 관논지시에 기증되었으며, 2016년 새로운 기념관이 개관했다.[40]

2. 1. 초기 생애

오히라 마사요시는 1910년 3월 12일 가가와현 미토요군 와다촌(현 관음사시)에서 농부인 오히라 도시요시와 그의 아내 사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마을 의회와 관개 조합의 대표였다.[2][3] 형제자매는 여덟 명이었지만, 오히라가 태어났을 때 장녀는 만 1세, 형 중 한 명은 2세 반에 이미 사망했다.[3] 오히라는 자신을 "사누키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그의 가족은 중산층이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여섯 자녀를 부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오히라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부업을 도왔다.[2][3]

오히라는 와다무라 정촌 다이쇼 보통고등소학교(현 간온지시립 도요하마소학교), 구제 가가와현립 산토요 중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중학교 4학년 때 장티푸스에 걸려 4개월 동안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다.[3] 가계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해군병학교 시험을 보려고 했지만, 시험 전에 급성 중이염을 앓아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되었다. 이듬해인 1928년, 친척들의 도움과 장학금을 받아 가가와대학 경제학부의 전신인 고마쓰 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고상에 입학한 봄, 사토 사다키치의 강연을 계기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고, 1929년 말 칸온지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16]

고상 졸업 후, 오히라는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 포기했다. 쇼와 대공황의 여파로 취업도 어려웠기 때문에, 모모야 준텐칸에서 화장품업에 종사하며 식객 생활을 했다. 1933년, 다시 학업에 복귀하기로 결심한 오히라는 가마다 공제회와 가가와현 육영회의 두 개의 장학금을 받아 도쿄 상과대학(현 일련대학)에 23세의 나이로 진학했다.[2] 분쿄구센다기에 거처를 마련하고, 재학 중에는 스기무라 코조, 마키노 에이이치 등의 강의를 수강했다. 요네야니 류조를 사사했다고도 전해진다.[17] 기독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YMCA 활동에 종사했다. 대학 재학 중, 요시나가 에이죠, 후가시 소이치, 무노 요시하루, 코지마 타사쿠 등과 함께 헌법의 타나가미 조지 강사와 국제법 교수 오오히라 젠고를 중심으로 한 연구회에서 고등시험 공부를 했다.[18]

1936년 대학을 졸업하고 재무성에 들어가 이케다 하야토의 눈에 띄어 그의 측근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이케다가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재무대신을 역임했을 때, 오히라는 그의 비서관으로 일했다.

2. 2. 정치 경력

1935년 고등 시험(행정과)에 합격한 후 1936년 대장성에 들어가 근무했다. 1951년 이케다 하야토 대장대신의 비서관으로 지냈으며, 1952년 중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돼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20] 1960년 이케다 내각에서 관방장관, 1962년외무대신으로 지냈고, 1964년 사토 에이사쿠 정권이 들어선 후 자유민주당 정조회장을 지냈다. 이후 사토 내각의 통상산업대신,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취임하여 같은 해 1972년 9월에 다나카 총리와 함께 중국을 방문,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이끌었다.[28]

1978년의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하여 당시 재선을 노리는 후쿠다 다케오와의 대결에서 후쿠다는 선거에서 후보직을 사퇴, 자민당 총재로 선출됨과 동시에 제68대 총리로 취임했다. 이듬해인 1979년에 제69대 총리로 재선되면서 제2차 내각(제2차 오히라 내각)을 발족했다.

1952년, 이케다 하야토의 권유로 오히라 마사요시는 일본 국회(일본 국회의원 의원)의 10선에 도전하여 당선되었으며, 처음에는 일본 자유당(Liberal Party (Japan, 1950))을 대표하다가 이후에는 후계 정당인 일본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LDP)을 대표하게 되었다.

1957년, 이케다 하야토가 총리가 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오히라 마사요시는 이케다의 싱크탱크인 고치카이(Kōchikai)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이케다의 오른팔로 널리 인식되었다.[4] 그는 이케다의 연설문과 선거 공약 작성을 도왔다.[4]

1960년, 안보 투쟁(1960 Anpo Protests)으로 인해 기시 노부스케가 사퇴하자 이케다 하야토가 총리가 되었다. 오히라 마사요시는 일본 국민의 관심을 치열한 정치적 투쟁에서 전국적인 경제 성장 추진으로 돌리는 데 기여한 이케다의 유명한 소득 배증 계획(Income Doubling Plan)의 설계 및 실행을 지원했다.[5]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오히라 마사요시는 이케다 하야토의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이 직책에서 1965년 일본과 대한민국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섬세한 협상을 진행했다. 1964년 이케다 하야토가 사망하자 오히라 마사요시는 그의 파벌을 계승하였다.

같은 해 10월 20일과 11월 12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KCIA) 국장 김종필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도쿄에서 가졌다. 경제 협력에 관해 무상으로 3억 달러, 장기 저리 차관 2억 달러, 더불어 민간 신용 공여 1억 달러 이상으로 합의했다. 이 합의 내용은 후에 “오히라-김 메모”로 불렸다.[21][22]

나가사키 국기 사건에 의해 단절된 일중 관계를 현실적인 중대한 과제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대중 관계 개선에 임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봉쇄” 정책에 고통받으면서도, 일중 경제 무역 관계의 확대를 철저히 추구했다.[23]

한미핵반입문제에서 당사자로서 미국과의 핵밀약 체결에 관여했다. 외무대신 시절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의 여파로 주일미군·자위대가 긴장 상태에 있었고, 핵·원자력 관련 문제가 많았다. [24]

1976년에는 후쿠다 다케오와 “2년 뒤 오히라에게 정권 이양”을 한다는 대복밀약을 맺고 대복연합을 수립했다.[28]

2. 3. 총리 재임

1935년 대장성에 입성하여 근무한 후, 195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960년 이케다 내각에서 관방장관, 1962년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취임하여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이끌었다.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 다케오를 누르고 총재로 선출되어 제68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취임 직후 총리 관저에서 극우 남성의 습격 사건(미수)이 발생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제69대 총리로 재선되어 제2차 오히라 내각을 발족했다.

오히라는 전원도시 구상, 환태평양 연대 구상, 종합 안보 구상 등을 제창했다. 이란 혁명, 제2차 석유 위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신냉전 시대"의 국제 정세에 대응하여 미국과의 안보 관계를 강화하고, 모스크바 올림픽 출전 보이콧을 결정하는 등 대미 협력 노선을 명확히 했다. 또한,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정부 차관 제공, 일중 문화 교류 협정 체결 등 1980년대 일중 긴밀화의 길을 열었다.

1979년 일본국헌법황실전범 하에서 법적 근거가 소멸했던 연호를 법률에 따라 개원할 수 있도록 한 연호법을 시행했다.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를 밑도는 결과를 초래하자, 당내 항쟁(40일 항쟁)이 발생했다. 오히라는 1980년 사회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자 중의원을 해산(돌발 해산)하고, 중참 동일 선거를 통해 정국 돌파를 시도했다.

1980년 5월 30일 총선거 공시 후 가두연설 직후 쓰러져 부정맥 등 합병증으로 입원했다. 6월 12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2. 4. 갑작스러운 죽음

197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여 제68대 총리로 취임한 오히라 마사요시는 이듬해 제69대 총리로 재선되어 제2차 오히라 내각을 발족했다.[33] 그러나 1980년 5월 30일 총선거 공시 후 가두연설 직후 갑자기 쓰러져 과로와 부정맥 등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34]

오히라는 70세의 고령과 심장의 지병이 있었고, 총리 취임 이후 과중한 업무와 국내외 정국으로 인한 심적 부담으로 인해 육체적 한계에 달해 있었다.[34] 이전에도 니트로글리세린을 복용한 적이 있었지만 공표되지는 않았다.[34]

오히라의 입원을 두고 자민당 내 반주류파 의원들은 6월에 예정된 주요 선진국 정상회의 참석 문제를 거론하며 오히라의 퇴진을 요구했다.[34] 나카가와 이치로는 건강 문제를 이유로 총리직 사퇴를 주장했고, 고모토 도시오는 완쾌를 기원한다면서도 정상회의 참석 여부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압박했다.[34] 심지어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마저 과도 정권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오히라의 퇴진을 시사했다.[34] 오히라는 이러한 퇴진 압박에 크게 격노했다고 알려진다.

입원 중에도 오히라는 퇴원 후 정상 회담에 참석할 의지를 보였으나, 6월 12일 오전 5시경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7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35][28]

오히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이토 마사요시 관방장관이 총리 임시대리를 맡았고, 자민당은 사쿠라우치 요시오 사무총장의 주도로 "조의 선거(弔い選挙)"를 치러 15년 만에 최대 승리를 거두었다.[28] 선거 후 스즈키 젠코가 오히라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사망 후 오히라에게는 대훈위국화대수장이 추증되고, 정이위에 서임되었다.[37] 장례식은 내각과 자민당의 합동으로 거행되었으며, 국장 대신 조용한 장례를 희망한 이토의 주장이 반영되었다.[37] 묘소는 도쿄의 다가 묘원과 고향 도요하마의 묘지 공원에 있다.[37]

고향에 있던 선거 사무소는 오히라 마사요시 기념관이 되었으나, 건물 노후화로 2015년 폐관했다.[37] 이후 국립국회도서관과 가가와현립도서관에 문서와 장서가 기증되었고, 2016년 현립 도서관 내 "오히라 마사요시 문고"가 개설되었다.[38] 유품은 관논지시에 기증되었으며, 2016년 새로운 기념관이 개관했다.[40]

3. 대한민국과의 관계

1962년 외무대신으로 재직할 당시 한국과의 국교 수립 교섭 과정에서 중앙정보부김종필 중정부장과의 두 차례 회담을 통해 최대 난제 중 하나인 한국의 대일 청구권과 관련해서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회담 타결의 돌파구를 찾아내기도 하였다.[68]

3. 1. 김종필-오히라 메모

1962년 외무대신으로 재직할 당시 한국과의 국교 수립 교섭과정에서 중앙정보부김종필 중정부장과의 두 차례 회담을 통해 최대 난제중의 하나인 한국의 대일청구권과 관련해서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회담 타결의 돌파구를 찾아내기도 하였다.[68]

3. 2. 한일 기본 조약 체결 기여

1962년 외무대신으로 재직할 당시 한국과의 국교 수립 교섭과정에서 중앙정보부김종필 중정부장과의 두 차례 회담을 통해 최대 난제중의 하나인 한국의 대일청구권과 관련해서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회담 타결의 돌파구를 찾아내기도 하였다.[68]

4. 평가

오히라 마사요시는 개인적인 정치가로서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오히라 정권은 당내 항쟁에 매몰되어 내각으로서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1] 스즈키 젠코는 오히라가 남긴 저서와 문헌은 깊은 사색과 사상을 가진 정치가, 총리로 평가받지만, 실제로는 정계의 탁류에 매몰되었다고 평가했다.[41] 다나카 가쿠에이는 오히라를 정치가라기보다는 종교가, 철학자 같다고 평가했다.

모리타 이치는 오히라의 첫인상이 우둔한 소와 같았지만, 독서량에서 비롯된 지성과 국제적인 시야, 그리고 인격에 압도되었다고 회상하며, 인간적으로 신과 가까운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대장성 출신으로 재무대신 시절에는 적자국채 발행과 재정 재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재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42]

오히라는 미키 내각의 재무대신 시절 적자국채 발행에 대한 책임감으로 총리대신 취임 후 일반소비세 도입을 제창했지만, 당내 반발과 여론의 반대로 좌절되었다.[42]

오히라는 외교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이케다 내각 시대의 일한 협상, 다나카 내각 시대의 일중 국교 정상화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총리대신 시절 제안한 "환태평양 연대 구상"은 APEC 등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협력으로 이어졌다. 덩샤오핑과의 교류를 통해 개혁 개방 구상에 영향을 주었다.[43][44][45][46][47]

소탈하고 겸손한 성품이었지만, "전후 정계 최고의 지성파"라는 평가[48]를 받으며, 학문과 인간의 지적 활동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았다.[48] "종합 안보"를 제창하고 적극적인 국제 공헌을 주장하는 등 그의 정치 사상과 경제관은 재평가되고 있다.[49]

4. 1. 긍정적 평가

4. 2. 중도적 평가

5. 유산

오히라 마사요시는 사망 후 1980년 6월 12일 일본의 국화훈장 대수훈장을 수여받았다.[12] 또한 같은 해 일본 스카우트 연맹의 황금꿩상을 수여받았다.[13] 멕시코 멕시코시티에는 그를 기리는 공원이 있는데, 추루부스코 강 남쪽과 틀랄판 대로 동쪽에 위치해 있다.

5. 1. 환태평양 협력 구상

5. 2. 오히라 마사요시 기념관

6. 어록

오히라 마사요시는 연설이나 답변을 시작할 때 "아-", "우-"와 같은 말을 앞에 붙이는 버릇이 있어 '''아우 총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50] 외모 때문에 '''사누키의 둔우'''라고도 불렸지만, 실제로는 머리가 빠르고 유머 감각도 있었다.[50] 다나카 가쿠에이는 "아우를 빼면 훌륭한 문어체가 되는 거야."라며 오히라를 옹호했다.[50]

오히라 본인은 "외무대신의 답변은 워싱턴, 모스크바, 베이징도 주의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아-'라고 하면서 생각하고, '우-'라고 하면서 문장을 다듬어서 말하는 버릇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이 "아우"는 당시 유행어가 되어 아이들이 따라 하기도 했다.

오히라는 유머를 섞으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능숙했다. 방미 시 고래잡이 문제에 대한 질문에 "고래는 너무 커서 제 손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해 기자들을 웃게 했고, 국회에서 야당의 질문에는 "저는 아ー우ー입니다."라고 말한 후 답변하기도 했다.

장녀에게는 "여자는 공부할 필요 없다. 예쁜 여자가 되어라. 그리고 빨리 시집가라."라고 말해 이치카와 후사에에게 여성 멸시로 비판받았으나, "아버지로서 빨리 시집가서 여자의 행복을 추구하게 하고 싶었다"고 해명하며, "여성은 남성보다 일에 성실하고 도의 감각에 예민하며, 특히 아이를 낳는 경험은 남성이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여성을 존경한다"고 답해 의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54]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A급 전범 합사 전에 참배한 적이 있으며, "A급 전범 또는 대동아 전쟁이라는 것에 대한 심판은 역사가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55]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내일 시들 꽃에도 물을 주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포르노 규제에 대해서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을 들어 신중한 입장을 보이며, 국민 수준에서의 자주 규제를 주장했다.

정적이었던 후쿠다 다케오에 대해서도 그의 식견을 높이 평가했다. 사십일 항쟁 당시 가토 고이치에게 "만일 내가 지금 여기서 죽으면, 일본을 위해 총리를 시켜야 할 사람은 후쿠다 다케오다."라고 말했다.[57]

7. 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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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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